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폰 몰트케 (문단 편집)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그 이후 ===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보오전쟁에서의 공 덕분에 또한번 몰트케의 작전은 의심없이 채택되었다. 몰트케의 계획은 모든 군대를 [[마인츠]]의 남쪽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다. 3개의 군으로 나누어 전부 마인츠의 남쪽에 두었다. 만약 프랑스군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중립을 무시하고, [[쾰른]]이나 [[라인강]]의 아무지점으로 진격할시, [[독일 제국군]]이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몰트케는 [[스트라스부르]] 근처보다는 [[메스(프랑스)|메스]]에 대부분의 군대를 둘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몰트케는 [[스당 전투]]를 지휘하였고 승리로 이끌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rte_zur_Schlacht_bei_Sedan_%2801.09.1870%29.jpg|width=400]]|| || [[1870년]] [[9월 1일]],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Sedan_(1870)|스당 전투]] 당시 병력배치 || [[프랑스 해군]] [[해군 육전대|육전대]]와 [[해병대]] 등으로 증원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이끄는 12만의 대군이 메츠 요새로 진군했으나, 새로운 프로이센군이 메츠로 가는 길을 막아섰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돌파가 여의치 않자 프랑스군은 일단 가까운 [[스당]] 요새로 후퇴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몰트케는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물샐틈 없이 '''스당 요새를 포위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요새를 향해 화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고, 이 포격에 실질적인 프랑스군 총사령관이었던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이 중상을 입으면서 프랑스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악착같이 포위망 탈출을 위해 노력했으나 특히 4차례에 걸친 기병돌격은 프로이센군 포병의 십자포화에 실패로 돌아갔고[* 스당 요새에서 포위를 뚫으려고 프랑스 기병대의 자살에 가까운 돌격이 몇 번 이어지자 빌헬름 1세는 "진정 용감한 사람들" 이라며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애당초 임시로 들어간 스당 요새에 식량이나 탄환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 || [[파일:external/www.akg-images.de/AKG73670.jpg|width=600]] || || 스당의 항복.[* The Capitulation of Sedan.] || 거기다가 프로이센군이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하니, 9월 1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했다. 나폴레옹 3세가 겁쟁이가 아니라 애초에 스당 요새로 쫓겨들어간 순간 별 대책이 없었다. 병력도 적고 화력도 프로이센군이 강했기 때문...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BismarckundNapoleonIII.jpg|width=600]] || || [[스당 전투]] 이후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br][[1878년]]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작품, || 나폴레옹 3세는 항복을 하면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에게 자비를 구하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이를 막아섰고, 결국 아무런 관용 없이 장교를 제외한 병사는 모두 무장 해제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몰트케는 보불전쟁에서의 공으로 대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독일 제국군]]의 첫번째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스당 전투에서의 공으로 몰트케는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후 보불전쟁 승리 이듬해인 1872년 프로이센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고, [[푸르 르 메리트]] 대십자상을 받기도 하였다. 전쟁 승리 이후 1879년부터 노령으로 인한 은퇴를 요청하지만 황제는 몰트케에게 군에 대한 공적이 너무 위대하여 경이 살아 있는 한 퇴역을 고려할 수 없다고 하며 사직 요청을 지속적으로 반려했다. 이때부터 황제가 계속 참모총장으로 붙잡으려고 [[알프레트 폰 발더제]]를 참모차장으로 임명하여 업무를 경감시켜 주었으며 조카인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까지 부관으로 붙여서 은퇴를 계속 막았다. 1883년에는 황제의 칙령으로 언제든지 평시에도 황제를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참모총장이 육군본부의 예속되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지만 몰트케는 예외적으로 군의 장비 문제에 한하여만 통제받았으며 나머지 사항은 육군본부에 예속되지 않았다. || [[파일:Helmuth_Karl_Bernhard_Graf_von_Moltke.jpg|width=300]] || || 참모총장으로 역임 중의 몰트케 || 1888년에는 '''30년동안 재직한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났다. 독일제국군의 차기 참모총장은 [[알프레트 폰 발더제]] 기병대장이었다.[* 훗날 [[의화단 운동|의화단 전쟁]]에서 8개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는 그 사람이다. 다만 공화국의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은 귀족 계급에 황제의 신하였던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1890년 90세 생일에 황제 [[빌헬름 2세]]와 독일 각국의 제후들 군 고관들이 성대한 축하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듬해 1891년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비스마르크처럼 [[빌헬름 2세]]와 그의 측근들이 보였던 호전적인 [[군국주의]]를 경계했고, 1890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독일 의회에 몸소 출석해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 몰트케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범위가 어마어마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몰트케는 그 다음해 사망했으나 그의 선견지명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